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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광장> 철학교육, 학교 현장에서 교양교과의 역할
기사입력 2024-03-22 오전 11:36:00 | 최종수정 2024-03-22 오전 11:36:19   

이수민
문영여자고등학교 교사


현재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과를 가르치고 있다.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 열에 다섯은 윤리를 가르치냐고 되묻고, 나머지 다섯은 방과후 교과 등으로 생각하며 정규 교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고등학교 교양교과로서의 철학 교과는 생소한 것이 현실이다. 철학 교과는 교양교과군의 과목으로, 종교학, 교육학, 심리학 등과 함께 학교장이 선택할 수 있는 교과 중 하나다. 평가는 P/F (Pass/Fail) 형태고, 수행 평가도 활동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만으로 평가가 이루어진다.

이 수업을 '쉬는 시간'으로 만들지 아니면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지는 전적으로 교사와 학생들에게 달려 있다. 필자는 학생들이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시간으로 사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시험도 없는데 좀 놀면 안 되나요?"라는 원망 섞인 요구를 받기도 했다.


▲ 토론과 소통, 자기 생각 말하기

원망까지 받아 가며 학생들이 얻어가기를 바란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수능이 끝나고, 무얼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방황하는 학생들을 수없이 봐왔다. 철학 수업의 역할 중 하나가 자기 생각을 명확히 함으로써 올바른 해답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필자의 중요한 역할은 매시간 토론 주제를 정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의 선호와 생각을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훈련이 필요한 작업이다. 모든 학생이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데에는 조별 토론만 한 것이 없다. 그래서 내 수업의 목표는 의견을 나누는 토의에서 시작해서 건설적인 결론을 내리는 토론까지 훈련을 시키는 것까지가 포함된다.

그러다 보니, 토론 주제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수업 준비다. 의미 없는 토론을 하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철학 자체에 반감이 생길 뿐이다. 매 차시 교과서의 방향성, 단원의 맥락, 전년도 학생들의 반응 등을 고려해 수업 및 토론 주제를 취사선택하여 개발한다.


▲ 너희는 뭐 할 때 재밌니?

그중 1학기를 여는 주제는 공부를 하는 이유와 삶의 방향성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곧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 되고, 가치관을 묻는 수업이 된다. 이 수업은 늘 '돈'이라는 가치와 싸우는 수업이 된다. 학생들은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 한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면 말하지 않아도 좋다고 안내하지만 학생들은 "떠오르는 게 없어요."라며 우물거릴 뿐이다. "언젠간 하고 싶은 게 생기지 않을까요? "하고 묻는 학생들도 있었다. 필자는 이 ‘언젠가’를 손에 잡히게 만드는 것이 철학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 찾기’, ‘좋아하는 것 찾기’, ‘살고 싶은 모습 찾기’는 한 달여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다. 1차시에는 공부가 재미있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가고 싶은 가상의 학교를 구상하며 배우고 싶은 것에 대해 고민한다. 2차시에는 공부에서 삶으로 원하는 것을 확장시켜, 어떠한 삶, 더 구체적으로 어떤 일상을 영위하고 싶은지 묻는다. 3차시에는 가상의 인물인 조르바와 철학자 니체(Nietzsche)의 삶의 태도를 비교해가며 둘 중 누구의 삶을 살고 싶은지 논쟁적인 토론을 하며, 4차시에는 복권에 당첨되어 돈의 제약이 사라진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위시 리스트(wish list)를 작성한다.

이러한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은 항상 모둠을 이루어 활동한다. 서로의 의견을 비교하고, 때로는 대립되는 입장에 서서 토론해보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해 간다. 이 모든 과정은 가치관을 명확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모든 수업이 진행된 이후, 학년 말이 되면 여태까지 수업했던 내용을 모아 보드게임을 진행한다. 각 칸에 도달한 학생들은 해당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걸로 땅을 얻을 수 있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지조차 말하기 힘들어했던 학생들이, 학년 말이 되면 십 초 안에 중요한 여러 쟁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된다.


▲ 사서 고생하기

이러한 활동들이 바탕이 되어, 학생들은 학기에 한 번 발표를 해야 한다. 아무리 부담 없는 분량의 발표라지만 성적에도 들어가지 않는 교양교과의 발표까지 하는 것은 제법 부담이 되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교양교과의 위치는 학생들도 교사들도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시험도 보지 않고,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외의 평가는 없기에 교사에게도 학생들에게도 부담 없는 자리이다. 그런 교양교과에 교사인 나도 학생들도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서 고생하는 격이다. 오직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훈련하기 위해 설정된 교육과정과 발표는 확실히 서로 간에 고생이다.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교과를 잘 따라주는 학생들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그렇기에 나도 최선을 다해, 이 고생이 의미를 가지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평소에 추구하던 가치에서 벗어나는 시간은 아주 소중하고 의미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들이 학년말에 써 준 만족도 조사와 의견들을 보면 이 기대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일주일에 한 시간뿐인 수업이지만 롤링페이퍼까지 정성스럽게 써 준 학생들 덕분에 내 수업의 의미와 나의 역할에 대한 의심이 사라졌다. 많은 학생이 실제로 이 수업에서 재미를 느끼고 많은 의미를 찾았다고 말해주어 고마웠다.

처음에는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잘 써준다는 달콤한 말로 아이들을 유혹했지만, 성실함, 노력, 성적 등 고등학생들에게 강조되던 가치에서 벗어나 그 이상의 목표와 가치를 탐구하는 시간은 아이들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쌓여갈수록 아이들은 변한다. 점점 수업에서 제시한 주제 이상을 탐구하고, 교사인 내가 역으로 배울 수 있는 깊은 생각도 조리 있게 말해낸다. 드물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나서도 철학 시간에 작성한 학습지를 소중히 간직하는 학생들도 있다. 학습지에 적힌 오롯한 자기 생각이 소중한 자산이 된 것이다. 아직 많은 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소중한 시간이 다양한 형태로 전해질 수 있게, 철학을 비롯한 고등학교 교양교과가 확대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기사제공 : 주간교육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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